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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 rss
2008/10/08 01:53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면서, 다니엘 헤니가 정려원과 농담 따먹기를 하는 한옥형 게스트하우스가 어딘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저런 곳도 있나보다 무심하게 흘려보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2주 전 김기덕 감독의 신작 <비몽>을 보면서, 란(이나영)이 몽유상태로 옛 애인이 사는 그 집을 찾아가는 걸 보면서도 역시나 궁금하지 않았다. <비몽>은 영화의 많은 부분에서 전통가옥을 보여주고 있는데, 영화 속 한옥들은 이른바 리노베이션을 견디고 반지르르하게 닦여 있었다. 미닫이 문이 자동으로 스르르 밀려 열리는가 하면, 안에서 빗장을 걸어야 할 대문은 넘버락을 눌러 열었다. 한옥을 모양새만 남겨두고 편리한 방향으로 개조해 놓은 모습은 전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그 많은 장식들에도 오히려 촌스러웠다. 물론, 내가 한옥에 살아야 했다면 보수와 개조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한옥에 살았던 어린 날들을 떠올리면 난방이나 온수부터 보안에 이르기까지 불편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습게도, <내 이름은 김삼순>과 <비몽>에 나온 그 두 개의 공간이, 내 유년기의 3년과 많은 주말을 보냈던 곳이라는 걸 이번 주 발행된 <무비위크>를 보고서야 알았다. 정말이지 인간의 기억은 믿을 것이 못되며 카메라의 앵글은 참도 잘 사람을 속인다. 뒷북이라도 치는 기분으로 지금은 게스트하우스가 된 그곳을 소개한 웹사이트를 찾았다. 친절하게 평면도도 나와있더군. 평면도를 보니 구조는 거의 바꾸지 않았다. 부엌 자리는 그대로 부엌이었고, 안방자리에 '안방1'이 행랑채 자리에 행랑채가 그대로 있었다. 안방과 부엌으로 이어지던 좁은 공간이 '안방2'라는 이름을 달고 없던 자리에 그려져 있다는 걸 제외하고는 구조상 달라진 점은 없어보였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높게 쌓은 화단과 대추나무가 서있던, 그리고 나만 보면 왈왈 짖던 나보다 한살 많던 북실이 집이 있던 자리에 정자를 세웠다는 정도. 할머니와 고모가 집을 팔고 이사한 뒤로 그러니까 한 2000년하고도 몇년이 지난 뒤로는 가본 적 없지만, 평면도와 몇 장의 사진만으로도 아주 쉽게 그 공간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라는 게 조금은 믿을만 한가보다.

어제 후배 M을 만나 북촌을 걸었다. 열기를 뿜어내거나 이리저리 불규칙하게 꺼져있던 아스팔트는 반듯한 보도블록으로 바뀌어있었다. 내가 살던 때만 해도 그곳은 북촌이 아니었다. 북촌이라는 이름이 새롭다는게 아니라 그냥 재동 아니면 계동이었거나 가회동이거나 원서동이었거나 뭐 그랬다. 집 앞까지 가려면 좁은 골목과 그보다 더 좁은 골목이 꼬불꼬불 이어지는 미로를 통과해야 했는데, 어떤 골목은 너무 더러워서 '똥골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똥골목은 더럽기보다도 좁고 으슥해서 다니길 꺼렸는데,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문득 궁금했다. 재동초등학교 앞을 지나며, 그래 내가 여기서 왁스로 바닥 꽤나 닦았지, 현대사옥을 지나며 현대공원이 내 놀이터였지, 재동 슈퍼마켓을 지나며 저집 아들이랑 별 것 아닌 일로 손등에서 진물이 흐를 때까지 꼬집고 싸웠지, 정독도서관 앞을 지나며, 비오는 날 엄마가 신지 말라는 슬리퍼 신고 나갔다가 미끄러졌지, 그때 무지 아팠는데. 이렇게 어딘가 꼬깃꼬깃 접혀있던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그런데 어쨌거나 오늘의 모습들에 아쉬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20년 전쯤의 내 기억은 그렇게 지금 그 장소에 남아있는 것들에 의해서만 하나씩 되살아나진다는 사실이 슬펐다. 어떤 기억은 지금 떠오른 것들보다 몇배는 더 소중할 텐데, 기억을 불러다줄 장면들이 현재에 존재하지 않아서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어느샌가 사라진 북촌의 옛 모습들이 내 기억의 증발과 닿아있는 것 같았다. 좋아했던 남자아이와 아이스크림을 먹던 기억이나, <애프터 더 레인>이라는 타이 음식점이 선 그 자리에서 리코더를 불고, 고무줄을 뛰던 기억 같은 건, 이렇게 슬픈 마음이 들고 나서 헤집고 뒤집어 먼지 속을 거닐었더니 겨우 조금씩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억이라는 건 역시 믿을 수 없는 거다.

도시의 풍경이, 주변의 그림자가, 하늘의 모양이 바뀌는 것은 내 기억의 풍경이 바뀌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
지금도 퇴촌 엄마 집에 가면, 아빠가 대학생일 때 그렸다는 계동 집 그림이 있다.
유화인데다가 소실점도 너무 멀고 거칠고 탁한 느낌이라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제 북촌을 걷고 나니 그 그림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어릴 때 그집에서 찍은 사진들도 찾아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기록은 정말 기억을 지배하는구나.

++
그 장면 스틸있으면 제보바람; 찾아서 올리려고 했으나 졸려서 포기했더라는.

rayuela | 2008/10/08 14:04 | PERMALINK | EDIT/DEL | REPLY
우와, 그런 집에 살았구나!
어렸을 때는 한옥 싫었는데 지금은 그 좁은 안뜰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참 예쁘고 살갑다는 생각이 든다능.
늙어서 그렇겠지 -_-
안냥 | 2008/10/08 21:05 | PERMALINK | EDIT/DEL
ㅇ_ㅇ 정말로, 최소한만 고치고 그대로 둘 수 있는 건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이젠 살지도 않는데, 들더라구요.
나도 늙어서 그런지, (오늘 중국집 갔더니 메뉴가 잘 안보였음) 나이먹은 것들에 대한 향수가 종종 있다는.
1 | 2008/10/08 23:34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아..뭔가 한옥은 나에겐 국사책에 나오는 공간의 느낌이야. 유모차를 타고 돌아다닐 때부터 아파트에 살았거든. 영화로건 드라마로건 사진으로건 한옥과 정겹고 좁다락한 골목들을 보면 나와는 다른 차원에서 흘러간 시간과 세계라는 생각이 들어...
안냥 | 2008/10/09 00:47 | PERMALINK | EDIT/DEL
난 초등학교 1,2학년 시기에 딱 한옥에 살았더니 뭔가 불편하면서도 아득한 느낌이 있더라구.
아파트가 편하고 좋은 건 확실한데, 여하튼 요즘엔 아파트가 아니라 땅집에 발붙이고 살고 싶단 생각이 초큼 들어.
확실히. 늙은 게야. ㅠ0ㅠ
1 | 2008/10/08 23:36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아. 그리고 다음에 메신저에서 만나면 내 주소를 불러주겠음. 냉장고 자석 꼭 보내주기 바람!!! ㅋㅋㅋ
안냥 | 2008/10/09 00:46 | PERMALINK | EDIT/DEL
알겠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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